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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시크릿 노트를 연재하며1 예수를 유혹한 여자
정우택  |  happychung@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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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0.06.24  19:5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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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정우택의 장편소설 '예수의 시크릿 노트'의 첫 부분입니다. 예수의 시크릿 노트는 예수가 한국에 와서 교회를 돌아보고 많은 사람을 만나는 얘기 입니다. 

1회 : 예수를 유혹한 여자 

예수님이 급하게 한국에 오셨다. 천국 복음이 다 전파되면 그때 오시겠다고 약속하셨지만 “열일 다 제쳐놓고 빨리 가서 한국교회를 감찰하고 오라”는 하나님의 특별 명령에 따른 긴급 방문이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살아계신 아들이시다.

2000년 전 오순절 다락방에 성령이 임하던 모습 그대로 예수님은 구름사을 타고 바람을 일으키며 오셨다. 하얀 구름이 순간적으로 하늘을 뒤덮고, 회오리 바람이 휘몰아칠 때 사뿐히 이 땅에 내리셨다. 예수님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신 분이라 아무도 이 영광의 모습을 보지 못했다.

이런 엄청난 사건이 생겼는데도 한국교회와 목사, 전도사, 장로와 교인들은 ‘예수님이 오시려면 아직 멀었다’며 느긋하게, 태평하게 지내고 있었다. 예수님의 갑작스런 방문을 낌새도 채지 못했다. 영적으로 둔해도 보통 둔한게 아니었다.

예수님은 믿지 않는 영혼이 많다고 소문난 부산으로 오셨다. 세상의 관례대로 하면 세계 최고의 인천공항을 통해 서울로 오셔서 교계 지도자와 정부 관계자의 으리으리한 영접도 받으셨을 것이다. 손을 흔들며 붉은 카펫 위도 걸으셨을 것이다.

미국의 CNN과 뉴욕타임스, 영국의 BBC와 더타임스, 일본의 NHK와 요미우리신문, 중국 신화통신과 인민일보, 심지어 북한의 조선중앙통신과 노동신문까지 기자를 서울로 보냈을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나그네의 모습을 입고 혼자 오셨다. 마구간에서 낮은 자의 모습으로 태어나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고, 고통 속에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 한국에도 이런 낮은 모습으로, 나그네 차림으로 오셨다.

예수님은 머리를 길게 늘어뜨리고, 수염이 많이 자라셨다. 눈은 예리하고, 콧날이 우뚝하셨다. 얼굴은 평안하고, 인자한 모습에 약간 긴 편이셨다. 키는 보통 사람들보다 한뼘은 더 하셨다. 맨발로 오셨지만 많이 걸어야 하기에 바닦이 부드러운 스폰지 운동화를 신으셨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보내시면서 ‘보디가’라는 비밀 경호원을 붙여주셨다. 혹시라도 있을지 모를 신체적 위해를 예방하기 위해서였다. 예수님과 ‘보디가’는 거리를 두고 다니기 때문에 일반인은 경호원의 정체를 모른다.

예수님은 2000년 전 말씀을 전하고, 병든 자를 치료하며 사역하실 때는 제자를 데리고 다니셨다. 그래야 사역에 도움이 되었다. 한국 감찰에는 혼자 다니신다. 사람들이 예수님의 정체를 알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다.

예수님이 급히 오신 것은 한국교회가 파벌과 분파, 물질주의와 세속주의, 교회 지도자들의 싸움, 득실거리는 이단과 우상, 성경과 예수님에 대한 왜곡이 심각하다는 소리가 하늘나라까지 들렸기 때문이다.

그런가 하면 기도하고, 전도하고, 선교한다는 좋은 소문도 많이 들렸는데 예수님은 이들을 칭찬하실 계획이다. 예수님이 이들을 넉넉히 칭찬하시지만 급하게 오신 것은 교회와 교인에게 무척 두렵고 떨리는 일이었다.

예수님은 한국교회를 가까이서 감찰하시고 그 내용을 비밀 노트에 상세하게 기록하신다. 감찰 결과는 하나님께 보고된다. 사람 만나시랴, 칭찬하시랴, 책망하시랴, 비밀 노트 기록하시랴 눈코 뜰 새가 없으셨다.

예수님은 부산을 둘러본 후에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와 강원도, 경기도의 경계를 넘어 서울까지 가신다. 비행기나 KTX를 이용하면 금방 서울에 닿지만, 교회의 모습을 제대로 보려고 일부러 걸으셨다.

300일 동안 전국 5만여 개 교회 가운데 길가의 1000여 개 교회를 돌아보시는 힘든 여정이다. 이를 위해 눈도 크게 뜨시고, 귀도 활짝 열어 두셨다. 힘이 들 때도, 슬플 때도, 기쁠 때도, 행복한 순간도 참으로 많으셨다.

부산에 도착하자 향기로운 냄새와 썩는 냄새가 코를 찔렀다. 향기로운 냄새는 예수님을 향한 향기였다. 불신자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이를 실천하기 위해 애쓰는 목사와 성도가 내뿜는 달콤한 향기였다.

유혹을 이기려 애쓰고,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하고, 어려운 가운데도 나눔과 봉사를 실천하는 향기다. 사랑으로, 믿음으로, 충성과 헌신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이뤄가는 아름다운 모습이다.

반대로 악취도 대단했다. 일부 교회 지도자가 명예욕에 빠져 자리싸움을 벌이고, 물질의 유혹에 넘어가고, 성경을 가볍게 여기고, 분파를 만들고, 신자인지 불신자인지 구분이 안 되는 믿음 생활에서 나는 냄새였다.

예수님이 해운대 앞바다로 가셨다. 부둣가에 몇 시간을 혼자 서계셨다. 분주하게 드나드는 대형 상선을 바라보며 지중해 연안의 가이샤라 앞바다를 떠올리셨다. 많은 배가 드나들었다.

그런데 아무리 서 있어도 말을 거는 사람이 없었다. 사람은 많이 지나다니는 데 각자 자기 일만 열심히 하고 있었다. 다른 사람 신경 안 쓰고 먹고 살기 바쁜 모습이었다. 흔히 쓰는 말로 ‘각자도생’ (各自圖生)이었다.

‘먹고 살기 바빠서 그런지 사람이 와도 쳐다보지도 않네…….’

‘이스라엘에서도 새벽에 바닷가로 나갔을 때 제자들이 나를 알아보지 못하고 오히려 의심했어…….’

예수님은 이런 생각을 하며 생각에 잠기셨다.

성경에는 제자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장면이 나온다. 예수님이 부활해서 바닷가로 가셨는데 제자들이 의심하고, 알아보지 못하고, 두려워하는 모습이다. 이 모습이 바로 현대를 사는 우리의 모습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의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눅24:38-39)

바다를 바라보던 예수님은 갈릴리 바다에서 제자들을 부르던 기억이 새롭게 떠오르셨다. 함께 하던 열두 제자의 이름도 새록새록 생각나셨다. 예수님에게는 참으로 좋은 동역자이면서 훌륭한 제자들이었다.

‘제자들은 내가 부를 때 하던 일을 내려놓고 나를 따랐어.’

‘그 길이 고난의 길, 고통의 길, 희생의 길, 순교의 길, 십자가의 길이 될 텐데도 따라나서다니…….’

예수님은 코끝이 찡하셨다. 이들이 하던 일을 내려놓고 순수히 따른 것을 고맙고, 감사하게 생각하셨다.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 빌립, 바돌로메, 도마, 마태, 작은 야고보, 유다, 시몬, 가롯 유다까지……. 모두가 친근한 이름, 그리운 이름이다. 예수님과 함께하다 고난의 길을 간 제자들이다.

제자들이 2000년이 지난 오늘까지 이름을 남긴 것은 예수님이 부르셨을 때 배를 그대로 두고 고난의 길을 갔기 때문이다. 이들이 부르심에 따르지 않았다면 평범하게, 세상의 안목으로 살다 세상을 떠나갔을 것이다.

한참을 서 계시는데 40살쯤 되는 여자 2명이 걸어왔다. 얼굴에 덕지덕지 화장하고 입술은 새빨갛게 립스틱을 문질러댔다. 입술은 쥐 잡아먹은 것처럼 빨갰다. 손에는 멋진 핸드백, 금색의 휴대전화가 들려 있었다.

두 여자 모두 예쁘게 보이기 위해 요란하게 몸치장을 했다. 하지만 모습이 경건해 보이지는 않았다. 여자들이 예수님을 힐끔힐끔 쳐다봤다. 뭔가 할 말이 있는 것 같았다.

“반갑소. 물고기는 얼마나 잡았소?”

예수님이 먼저 말을 건네셨다. 바닷가에서 사람을 만나자 갈릴리 바다의 어부를 생각하고 반갑게 물으셨다.

“물고기요? 물고기 같은 소리 하시네……. 우리가 고기나 잡는 하찮은 여자로 보여요? 이렇게 예쁘게 치장한 ‘여왕벌’이 물에 들어가 고기 잡는 거 봤어요? 사람을 볼 줄 모르시나?”

여자들은 말씀하시는 분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외모를 자랑했다. 외모 자랑을 넘어 스스로 “여왕벌”이라고 했다. 요란한 외모 치장과 말하는 것으로 봐서 돈 좀 쓰고 다니는 여자들, 골치 아픈 여자들 같았다.

“지금 여왕벌이라고 했소?”

“그래요. 벌 중의 벌 여왕벌.”

두 여자는 기세가 등등했다.

“여왕벌이면 벌통에 들어가 알을 많이 낳고, 가족을 늘려 양봉 농가에 꿀이나 넘치게 제공해 주시오. 그게 여왕벌의 사명이오. 사명을 잘 감당해야 하나님의 칭찬을 받지 않겠소? 꽃 향기를 풍겨야 할 여왕벌이 비린내 나는 바닷가에서 헤매면 되겠소?”

예수님이 뼈 있게 한 말씀 하셨다.

“난 당신들을 고기 잡는 어부로 알았소. 바닷가니 당연히 고기 잡는 어부가 있어야 하지 않겠소? 이스라엘의 갈리리 바다에도 어부들이 아주 많았소.”

“어부? 세상을 그렇게도 몰라요? 우리는 고기 잡는 사람이 아니라 돈 쓰는 여자라고요. 돈과 외모는 뭐 하게요. 우리가 찜하면 어떤 남자든 꼼짝 못 한다는 거 알아요?”

말하는 것으로 봐 평범한 여자들이 아니었다. 집에서 남편의 속을 꽤 썩이는 여자들 같았다. 남자 여러 명을 들었다 놓을 여자들이었다.

“여기는 고기를 다 잡아 이젠 잡히지도 않아요. 아주 멀리 가서 잡아 와요. 성경에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던지라’ (눅5:4)고 했는데 이 말은 여기서는 안 통해요. ‘배 오른편에 그물을 던지라’ (요21:6)는 말도 통하지 않는 다고요.”

“그럼 뭐라고 해야 말이 통하오.”

예수님이 재차 물으셨다.

“깊은 데가 아니라 ‘멀리 가서 그물을 던지라’고 해야 맞을걸요. 배 오른편이 아니라 앞을 똑바로 보고 던져야 한다고요. 여기는 고기 씨가 말랐어요. 어부가 아니라 예수가 직접 그물을 던져도 고기가 없다고요…….”

‘뭐? 예수가 직접 그물을 던져도 고기가 없다고?’

놀랍게도 여자들은 상황에 어울리는 성경 말씀을 알고 있었다. 예수님은 교회를 걱정하며 이 땅에 오셨는데 맨 먼저 만난 사람이 예수 얘기를 하고, 갈릴리 바다의 어부 얘기를 해 마음이 두근두근하셨다.

‘바닷가 여자들이 성경 말씀을 이렇게 많이 알고 있다니…….’

‘하늘나라에서 듣던 소문이 잘못된 게 아닐까?’

‘한국에 가짜 뉴스가 많다고 하는 데 그럼 가짜 뉴스가 하늘나라까지 퍼진 건가?’

‘가짜 예수도 있다고 들었는데 혹시 이것도 잘못된 게 아니야?’

예수님은 여자의 말에 놀라 이런 생각을 다 하셨다.

“예수가 어부에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던지라’고 말한 것을 어떻게 아시오?”

“성경에 나와 있잖아요. 우리 목사가 수십 번을 얘기해서 다 알아요. 그렇지만 실제로 그렇게 말했는지 눈으로 보지는 못했어요. 사실인지 아닌지도 모르겠고요. 내 눈으로 보지 못했으니까…….”

한 여자는 놀랍게도 크리스천이었다. 그런데도 예수님의 갈릴리 바다 사역을 의심했다. 두 눈으로 보지 못해 믿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교회는 다니지만 하는 행동이나 말은 믿음이 없는 사람과 다를 게 없었다.

“사실이니 그렇게 기록되어 있지 않겠소? 2000년이 넘게 사람들이 그 사실을 믿고 있소. 지금도 지구상의 수십억 명이 갈릴리 바다에서 예수가 어부에게 한 말씀을 생생히 기억하고, 배운다는 것을 모르시오?

“당신이 교인이라면 갈릴리 사역을 의심해서는 안 되오. 교인이 예수의 사역을 믿지 않으면 누가 믿는단 말이오. 믿음은 눈에 보이지 않아도 성경 말씀에 있는 대로 믿는 것이오.”

예수님은 성경 말씀을 의심하지 말라고 하셨다. 그러자 한 여자가 기다렸다는 듯이 대꾸를 했다.

“내 친구 중에 교회 안 다니는 사람이 많은데 그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얘기가 뭔지 알아요? 2000년 전에 있었던 일을 지금 어떻게 믿느냐는 것이요. 하긴 교회에 다니는 나도 가끔 그런 생각이 들긴 들어요.”

이 말에 예수님은 가슴이 철렁하셨다.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예수를 의심하다니…….’

‘하기야, 믿음이 제대로 들어있다면 대낮에 새빨간 입술을 하고 바닷가를 헤매지는 않겠지…….’

예수님은 보지 않고 믿는 자에게 복이 있다고 거듭 말씀하셨다. 예수의 탄생과 부활이 역사적 사실이니 의심하지 말라고 하셨다. 성경은 의심 없이 믿는 자는 복이 있다고 말씀한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 되도다 하시느니라.” (요20:29)

“말이 나온 김에 한마디 충고하고 싶은데 괜찮겠소?”

“무슨 충고인지 몰라도 맘 놓고 다 해요. 우린 나이도 먹고, 얼굴이 두꺼워 노여움 같은 게 없어요.”

여자들은 무슨 충고라도 듣겠다고 했다.

“이왕이면 ‘목사’라고 하지 말고 ‘목사님’이라고 존댓말을 쓰는 게 좋지 않겠소? 교인이 목사를 ‘목사’ ‘목사’ 해서 되겠소? 또 목사가 수십 번을 ‘얘기했다’고 했는데 얘기가 아니라 ‘설교’라고 하시오.

“목사는 영적인 지도자요. 강아지 이름 부르듯 막 부르는 이름이 아니오. 믿지 않는 영혼을 구원하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영적 지도자를 그렇게 가볍게 불러서 되겠소? 더군다나 교인이 담임 목사를…….”

여자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예수님을 노려봤다. 예사로운 남자, 평범한 남자가 아니라는 표정이었다. 그러면서 질문을 했다.

“그런데 댁은 누군데 성경에 대해 그렇게 훤하게 꿰고 있는 거요? 나이는 동생 벌이고, 겉으로 봐서는 별 볼 일 없는 외국인 나그네처럼 생겼는데……. 그 머리에서 성경 얘기가 술술 나오다니 참 신기하네.”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지 마시오. 사람은 겉모습이 아니라 속마음, 마음의 중심을 봐야 하오. 성경을 읽으면 그런 말씀이 분명히 나올 것이오. 담임 목사도 설교를 여러 번 했을 것이오.

“말씀을 읽었으면 읽은 대로 행하지 않고, 왜 말씀과 다르게 행동하는 것이오? 믿음 생활은 사람의 생각이 아닌 예수의 말씀이 중심에 있어야 하오. 나를 외모로만 판단하지 마시오.”

예수님은 말씀을 계속하셨다. 말씀이라기보다 책망이 어울릴 것이다.

“하나님은 요란한 외모를 보시지 않소. 손에 들린 비싼 핸드백, 요란하게 화장한 얼굴 모습을 보시지 않는단 말이오. 이런 것은 인간적이고 외형적인 모습일 뿐이오. 자신을 과시하고, 나타내기 위한 수단이 아니오?”

여자가 눈을 똥그랗게 뜨자 예수님은 강하게 말씀하셨다. 예수님이 여자들에게 베드로전서의 말씀을 들려주셨다.

“너희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라.” (벧전3:3)

“이 말씀은 외모에 너무 신경을 쓰지 말라는 뜻이오. 그러니 겉모습만 보고 당신의 입맛대로 나를 평가해서는 안 되오. 나는 당신이 보는 것처럼 시시하게, 가볍게, 아무렇게나 외모로 평가될 사람이 아니오.”

예수님의 말씀을 듣던 여자가 갑자기 큰 관심을 보이며 물었다. 지금 앞에 있는 분이 우습게 볼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린 것 같았다.

“미안하지만 그쪽은 목사요? 장로요? 성경에 관해 풍월이 상당한 것 같아서 하는 말이요. 요새는 목사보다 많이 아는 장로도 있고, 지식과 경험이 장로보다 위에 있는 권사도 수두룩해서…….”

여자는 세상의 안목으로 예수님을 평가했다. 목사나 장로를 자진의 입맛과 기준에 맞게 재단했다. 잘못된 일이지만 거리낌 없이 말을 했다.

“내가 목사면 어떻고, 장로면 어떻소. 중요한 것은 마음의 중심이오. 내 마음에 주님을 모시고 있느냐, 얼마나 충성스럽게 모시느냐 하는 게 중요한 잣대요.

“교회 다니면서 마음의 중심에 하나님이 없고, 예수가 없고, 세상 정욕으로 차 있으면 되겠소? 당신의 모습은 마치 ‘사람을 위한 바벨탑’을 쌓는 것과 다르지 않소. 이왕이면 야곱처럼 ‘벧엘의 돌담’을 쌓으시오.”

예수님은 여자의 믿음이 부족한 것을 그냥 넘어가시지 않았다.

“나는 당신을 모르오. 그러나 성경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을 보니 신앙생활을 하는 것 같소. 신앙인이 예수님의 갈릴리 바다 사역에 의문을 제기하고, 눈으로 보지 못해 믿기 어렵다고 하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시오?

“그런 말은 믿음이 없는 사람이나 하면 되오. 내가 다 부끄러우니 어디 가서 그런 믿음 없는 말은 하지 마시오. 교인이 예수의 사역을 의심하고, 외모로 사람을 평가하면 되겠소? 믿음을 키워야 의심이나 의문이 줄어들 것이오.”

예수님은 눈으로 보지 못해 믿을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을 만나면 늘 이런 권면을 하셨다.

“요즘 교인은 사람만 외모를 보는 게 아니라 교회도 외모를 먼저 본다고 들었소. 교회 건물이 화려하고, 교인이 많아야 성령 충만하고, 은혜가 넘치는 것으로 생각한다고 들었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소. 중요한 것은 나 자신의 신실한 믿음이오.”

예수님은 외모와 신앙은 같이 가지 않는다고 하셨다. 중심을 보시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람은 겉모습을 더 본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 용모와 신장을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삼상16:7)

외모를 보지 말라는 성경 말씀을 읽어주셨지만 두 여자는 고마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예수님이 보시기에 좀 실망스러운 여자, 생각이 딴 곳에 있는 여자였다.

“여기가 교회인 줄 아나. 그런 얘기는 교회에서 설교 때 하면 되지 않아요? 바닷가에 와서 그런 얘기 또 듣는 것은 스트레스만 만들어요. 너무 많이 들어 어떤 때는 질려요. 아주 교회를 바닷가로 옮긴 것 같네…….”

두 여자는 대화를 나누고 있는 분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라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이를 알았다면 두 가지 반응을 보였을 것이다.

하나는 그 자리에 엎드려 숨을 죽일 것이고, 하나는 예수님의 팔을 붙들고 매달리며 돈 좀 벌게 해달라고, 남편이 속 썩이지 않게 해달라고, 자식이 좋은 대학에 가게 해달라고, 건강하게 해달라고 애원을 했을 것이다.

“이봐요, 남자 씨. 시간 있으면 소주나 한잔하면 어때요? 체격 보니 술 좀 하게 생겼네요……. 날씨도 좋고, 간만에 분위기도 있으니 그냥 헤어질 수 없잖아요.

“술은 우리가 쏠테니 저쪽에 가서 싱싱한 회 한 접시 놓고 소주나 하나 까요. 바닷가에서는 역시 싱싱한 생선회와 쓴 소주가 어울려. 우리가 이 맛에 사는 게 아니요?”

믿지 않는 여자가 겁도 없이 술이나 한잔하자며 예수님의 손을 살짝 잡아끌었다. 손을 당기면 바로 전기가 통하고, 불꽃이 일며 끌려올 것으로 생각했다. 무서운 유혹이었다. 예수님이 광야에서 겪으신 배고픔의 시험보다 더 큰 유혹이었다.

예수님은 너무 황당해 헛웃음이 다 나오셨다. 거지와 과부, 나그네,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 병자의 손길은 사랑하는 마음으로 얼마든지 잡아주고, 끌어주고, 위로해주지만 이런 유혹의 손길을 용납할 예수님이 아니셨다.

“참, 간도 크시오. 이 손을 치우시오.”

예수님이 단호히 거절하셨다.

“아니, 여자가 남자 손 한번 잡는 데 뭘 그렇게 놀라고 그래요. 남자가 겁이 왜 그렇게 많아…….”

여자가 볼멘소리를 했다.

“그런데, 당신은 이름이 무엇이오? 한국 속담에 이름값 한다는 말이 있기에 묻는 것이오.”

“이름요? 성은 ‘옥’이고 이름은 ‘잠화’요. 옥잠화! 옥잠화 꽃이 피면 향기가 진동해 나비가 얼마나 날아드는지 알아요? 이름도 잘 지어야 한몫을 한다니까……. 그래야 나비가 꼬이든지 사내들이 꼬이지.”

여자는 유혹을 넘어 아예 꼬리를 흔들어댔다. 엉덩이만 까내리지 않았을 뿐 대단한 유혹이었다. 성경에는 음욕과 간음에 관한 말씀이 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마5:28)

예수님은 마태복음에서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면 간음한 것이라고 하셨다. 반대로 여자가 이런 생각으로 남자를 봐도 간음한 것과 마찬가지라는 말씀이다. 남자고 여자고 이 말씀을 가볍게 받아서는 안 된다.

“이름은 참 아름다운데 하는 행동은 딴판이오. 꽃에서 아름다운 향기가 나지 않고, 비린내, 썩는 내가 나서 견딜 수가 없소. 꽃은 예쁜데 향기가 나쁘면 그런 꽃은 피나 마나가 아니요?

“당신의 손을 깨끗이 하고 좋은 일, 선한 일에 쓰시오. 유혹하는데 손을 사용해선 안 되오. 하나님께서 주신 거룩한 손으로 외간 남자의 손을 함부로 잡지 마시오. 집에 가서 남편과 자녀의 손이 닳도록 잡으시오.”

예수님은 여자를 눈물이 쑥 나오게 책망하셨다. 그냥 두면 다른 사람에게도 유혹의 손길을 내밀 수 있기에 유혹의 싹을 잘라놓을 생각이셨다.

“뭐요? 그럼 내가 당신을 미투 (#me-too)라도 했단 말이요? 약한 여자가 어떻게 힘센 남자를 미투해요! 그것도 코쟁이 외국 남자를……. 오늘은 재수도 없고, 일도 틀렸어.”

예수님을 유혹했던 여자가 오히려 화를 냈다. 우리 속담에 ‘똥 싼 놈이 화낸다’는 말이 있는데 이 여자가 그랬다.

미투는 남자가 우월적 지위나 힘을 이용해 여자를 성적으로 괴롭히는 것을 말한다. 최근에 문제가 된 문화예술인, 공직자, 체육인, 일부 종교인, 정치인의 미투가 이런 유형이다. 미투는 알려지면 ‘개망신’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사랑을 바탕으로 한 긍정적 측면의 미투를 보여주셨다. 성경에 보면 몸을 파는 여자가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혀 끌려왔을 때 예수님은 이를 용서하셨다. 죄 없는 사람이 먼저 여자를 돌로 치라고 하셨다.

“죄 없는 사람이 먼저 이 여자를 돌로 치라.” (요8:7)

간음한 여자를 끌고 온 남자들은 자신의 행실을 돌아봤다. 자신의 죄가 크다는 것을 알고 슬금슬금 도망쳤다. 예수님은 간음한 여인을 용서하시고 새 사람으로 변화시키셨다. 간음한 여인에게 예수님은 사랑의 미투였다.

영어로 쓰면 같은 ‘me-too’지만 사회의 미투는 상대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것이다. 힘 있는 사람이 성적으로,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정신적으로 약한 사람을 괴롭히고 귀찮게 하고 물질을 착취하는 것이다.

피해자 측에서 나도 폭행당했다, 나도 추행당했다, 나도 맞았다, 나도 빼앗겼다, 나도 피해를 봤다, 나도 괴롭힘을 당했다, 나도 억울하다고 한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있는 게 사회의 미투다.

예수님의 미투는 다르다. 죄에 빠진 사람을 용서하시고, 구원하신다. 병자를 고쳐주시고, 배고픈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시고, 넘어진 사람을 일으켜 주신다. 상처를 감싸주시고, 깨진 가정을 봉합시켜주신다. 다른 사람에게 베푸는 게 예수님의 미투다.

그래서 예수님으로부터 나도 용서 받았다, 나도 구원 받았다, 나도 성령 받았다, 나도 병고침 받았다, 나도 은혜 받았다, 나도 감동 받았다, 나도 사랑 받았다, 나도 만나를 공급 받았다, 나도 건강을 허락 받았다고 입을 모은다.

사람을 살리고, 세상을 살리는 게 예수님의 미투다. 예수님의 미투는 당할수록 좋다. 나쁜 의미로 쓰이는 세상의 미투와 개념과 차원이 전혀 다르다. 예수님의 품 안으로 들어오면 미투의 개념도 달라진다.

예수님은 여자들이 하는 말이 머리에 들어오지 않으셨다. 우선 ‘한번 쏜다’는 말이 이해가 되지 않으셨다. ‘소주를 하나 깐다’는 말도 알 수가 없으셨다. 2000년 전 예수님이 사역할 때 사용하던 말이 아니었다.

“나도 좀 물어보겠소. ‘한번 쏜다’는 말, ‘소주를 하나 깐다’는 말이 도대체 무슨 뜻이오? 말을 알아야 소통을 할 수 있지 않겠소?”

“쏜다는 말은 음식값을 낸다는 말이고, 소주를 깐다는 것은 술을 먹자는 뜻이요. 요새 사람이 그것도 몰라요? 생긴 것보다 아주 엉큼하시네. 하기야 내숭 떠는 남자를 좋아하는 정신 나간 여자도 있으니까…….”

믿지 않는 여자가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방금 예수님을 유혹했다가 책망 들은 것은 어느새 잊었다. 바로 잊어먹는 은사(?)가 있는 여자 같았다. 아니면 머리 회전이 둔한 여자일까? 뻔뻔한 여자일까?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 (엡5:18)

예수님은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셨다. 마치 고린도 교회의 타락한 모습 같았다. 한 입으로 성경 구절을 말하고, 그 입으로 술을 먹고, 남자를 유혹하는 것을 보면서 그냥 넘어가실 수가 없었다.

성경은 이를 두 마음이라고 한다. 한 입으로 성경을 읽고 우상의 말을 하는 것도 두 마음이다. 교인이 주일에 야외 나들이로 세상 즐거움에 빠지는 것도 두 마음이다. 두 마음은 서로 다른 마음으로 믿음을 뿌리까지 흔들어 놓는다.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 (약4:8)

예수님은 이 말씀을 통해 두 여자가 자숙할 것을 당부하셨다. 또 남편을 둔 여자가 외간 남자를 외모로, 술로 유혹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죄가 되니 조심하라는 경고의 말씀도 해주셨다.

“십계명에서 간음하지 말라, 남의 남자나 여자를 탐하지 말라고 가르치고 있으니 깨달음을 얻기 바라오. 나를 유혹할 정도로 할 일이 없으면 거리에 나가 쓰레기라도 주우시오. 그럼 칭찬도 받고 용돈도 생길 것이오.”

“간음한 여인들아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됨을 알지 못하느냐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이니라.” (약4:8)

예수님이 따끔하게 훈계를 하셨다. 여자들은 이런 훈계가 있을 줄은 생각도 못 했다.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이 남자 (예수님)도 유혹에 쉽게 넘어갈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착각이었다.

“갈수록 태산이네. 아까는 목사 같더니 이젠 아예 예수같이 말을 하시네. 외모는 거지 같은데 머리는 성경 말씀으로 꽉 차 있으니 뭐가 뭔지 알 수가 있어야지…….

“혹시 죽은 예수가 다시 살아났나? 아니야, 예수가 왜 지금 살아나서 해운대로 와? 하필 왜 우리 앞에 나타나? 그건 소름 끼치는 일이야!”

두 여자는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을 듣고 의심도 하고 이상하게도 여겼다. 허름하게 입은 외국인이 눈앞에서 성경 말씀을 할 것으로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예수가 언제 어떻게 올지 아무도 모르오.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 바 아니요’(행1:7) 라고 하셨소. 위엄 있는 모습으로 올 수도 있고, 나처럼 누추한 모습으로 소리소문없이 올 수도 있소. 지금 이 자리에 있는 내가 예수라면 어떻게 하겠소?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몸과 마음을 정결하게 하고 기도로 신랑을 맞이할 준비를 하시오. 남자를 낚으려 하지 말고,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시오. 이런 모습으로 지내다 주님이 오시면 어떻게 하려고 그러시오.”

예수님의 말씀에 두 여자는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서 있었다. 몸과 마음을 정결하게 하고 신랑 맞을 준비를 하라는 말씀이 예사롭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신들의 행동이 부끄러웠던 걸까?

“요즘 기독교에 대한 비판이 많은 데 혹시 당신들의 이런 모습이 빌미를 제공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시오. 신앙인이면 신앙인답게 처신하시오. 한 사람의 잘못이 다른 많은 사람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하시오.”

여자들은 뭐라고 말대꾸를 할 수가 없었다. 말을 할수록 자신들의 혀가 말리고, 말이 어눌해지기 때문이다. 쉽게 말하면 말문이 꽉 막힌 것이다.

바다에서 고기 대신 외간 남자를 낚으려 했던 두 여자는 예수님 앞에 고꾸라져야 했다. 아무리 외모를 포장하고, 매혹적인 말을 해도 유혹의 눈으로 사람을 낚을 수는 없었다. 오히려 예수님의 사랑에 낚임을 당했다.

두 여자가 예수님의 책망을 들은 것은 ‘하나님의 은혜’였다. 예수님을 만나지 않고 정욕을 탐하는 세상의 나쁜 남자를 만났다면 두 여자는 가정과 삶이 산산 조각났을 것이다. 실낱같은 믿음도 다 날아갔을 것이다.

예수님은 한국에 오시자마자 두 여자, 두 가정을 사랑의 손길로 구해주셨다. ‘예수의 미투’를 구체적으로 보여주셨다. 두 여자에게 베풀어주신 사랑은 모든 크리스천과 믿지 않는 사람을 향한 사랑의 징표였다.

예수님은 “300일간 한국 방문을 마치고 하나님께로 돌아갈 때까지 두 여자가 ‘사람을 낚는 어부’로 변화될 것으로 굳게 믿는다”고 비밀 노트에 기록하셨다.

예수님은 두 여자를 위해 기도하신 후 다음 곳으로 이동하셨다.

“아버지 하나님, 오늘 한국에 와서 맨 먼저 만난 사람이 교회에 다니면서도 신앙인답지 않게 행동하는 것을 보고 마음이 아팠습니다. 실망도 하고, 걱정도 했습니다.

“300일 동안 한국교회 감찰을 마치고 떠날 때 두 여자가 새 사람으로 변화되는 모습을 보게 하옵소서. 사람을 낚는 어부로 변화되게 하옵소서. ‘예수를 만나 새사람이 되었다’는 소리가 퍼지게 하옵소서.

“주님, 그들이 지금은 외모에 빠지고, 세상의 나쁜 것에 빠졌지만 교회에서 말씀에 빠지고, 은혜받고, 예수의 향기를 발하며 빛과 소금으로 살아가게 하옵소서. 아멘.”
정우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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